이른바 ‘한일협정’이라 불리는 1965년 대한민국과 일본국간의 기본관계에 관한 조약(한일기본조약)이 체결된 지도 60년이 지났습니다.
1965년 ‘한일협정’으로 강제동원 피해자들은 여전히 식민지배의 그림자 속에 갇혀 있습니다. 오늘 뉴스레터는 ‘한일협정’의 핵심적인 문제가 무엇인지, 피해자들과 유족들은 이를 극복하기 위해 어떤 싸움을 지속해오고 있는지 살펴보고자 합니다.
망각 속에 갇힌 피해자의 목소리
연합군 포로감시원으로 동원되었다가 전범으로 몰린 한국인 'BC급 전범'들은 필요할 때는 '일본인'으로 동원하고, 거북하면 '조선인'이라며 무시했던 일본의 이중적 태도와 그들에게 계속되고 있는 차별과 폭력을 고발했습니다.
하지만 한일회담에서 한국인 BC급 전범 문제는 논의조차 되지 않았습니다.
월남하여 서울에 살던 김흥근 씨는 1957년 3월 외무부에 탄원서를 보냈습니다.
일제 침략전쟁에 끌려가 희생된 아들의 유해라도 돌려달라는 안타까운 호소였습니다.
사할린에 강제동원되었다가 해방 후 억류되어 돌아오지 못한 동포들의 문제를 앞장서 알린 박노학 씨.
한일회담 당시 진정서를 수차례 제출했지만 일본도, 한국도 외면했다며 4만 여 한국인의 조속한 구출을 촉구하는 탄원서를 한일협정이 체결된 후 1967년에 또다시 한국 외교부에 제출했습니다.
"완전히 그리고 최종적으로 해결"되었다는 거짓 봉인
'1965년 체제'의 문제점
뒤틀린 출발점
: ‘배상’이 ‘청구권’으로 축소되다
한일 갈등의 출발점은 1951년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으로, 냉전 질서 속에서 일본의 식민지배 책임을 제대로 추궁하지 않은 ‘관대한 조약’이었습니다.
한국은 이 조약의 서명국에서 제외되었고, 불법적 식민지배에 대한 '배상' 요구는 원천적으로 봉쇄된 채 ‘재산 및 청구권’을 정리하는 양자 협상으로 축소되었습니다. 한국은 당초 식민지배 불법성을 묻는 포괄적인 ‘배상안’을 준비했으나, 이후 ‘대일 8항목 청구 요강’으로 조정되어 ‘청구권 요구’로 축소됩니다.
식민지배 책임의 ‘의도적 모호성’
1965년 한일기본조약 제2조는 과거 조약 및 협정이 “이미 무효(already null and void)임을 확인한다”고 명시했습니다.
이 문구는 식민 지배의 불법성과 책임 추궁이라는 핵심 쟁점을 해결하지 않고, 한국과 일본이 각자 다르게 해석할 여지를 남긴 ‘의도적 모호성’의 산물이었습니다. 한국은 ‘원천 무효’로, 일본은 병합조약은 합법이었으나 해방을 기점으로 ‘지금은 무효’로 해석하여, 이후 끊임없는 역사 갈등의 불씨를 남겼습니다.
‘경제 협력’의 이름으로 덮인 피해 회복
한일청구권협정 제2조 1항은 모든 청구권 문제가 “완전히 그리고 최종적으로 해결된 것이 된다는 것을 확인한다”고 명시하며, ‘배상’이 아닌 ‘경제협력’ 명목으로 자금을 제공하는 것으로 마무리되었습니다.
이 ‘1965년 체제’는 경제 성장의 발판을 마련했을지라도, 일본군 ‘위안부’, 강제동원, 원폭 피해자 등 수많은 개인의 피해 회복 문제는 논의되지 않은 채 외면되었습니다.
"나는 싸우고 있다"
망각에 맞선 피해자와 유족들의 투쟁
2005년 외교문서 공개와
일본의 법적 책임
오랜 기간 감춰져 있던 ‘65년 체제’의 진실은 2005년 한일회담 관련 외교문서가 공개되면서 드러났습니다.
‘민관공동위원회’는 일본군 ‘위안부’, 사할린 한인, 원폭 피해자 문제는 청구권 협정 대상에 포함되지 않았으며, 일본 정부의 법적 책임이 남아 있음을 공식 확인했습니다.
강제동원 피해자들의 법정 투쟁
강제동원 피해자들은 일본 정부와 전범 기업(신일본제철, 미쓰비시중공업, 후지코시 등)을 상대로 수십 년간 소송을 벌여왔습니다.
마침내 한국 대법원에서 일본 기업의 배상 책임을 인정하는 역사적인 판결을 끌어냈으나, 이들 기업은 여전히 사죄나 배상을 이행하지 않고 있습니다.
‘내 아버지의 이름을 빼라’
: 야스쿠니 합사 피해
일본 군국주의의 상징인 야스쿠니 신사에는 유족의 동의 없이 사망한 한국인 2만 1천여 명이 무단으로 합사되어 있습니다.
유족들은 이를 모욕으로 여기며 합사 취소 소송을 제기했으나, 신사 측은 ‘한번 합사된 영혼은 분리할 수 없다’는 논리로 정당한 요구를 거부하고 있습니다.
기억의 연대
: 망각과 부정에 맞선 질문
굴욕 외교 반대: 꺼지지 않은 1960년대 저항
1962년 ‘김-오히라 메모’를 통해 굴욕적인 비밀 협상 내용(독립축하금 명목의 무상 3억 달러 등)이 알려지자, 한국에서는 ‘제2의 을사늑약’이라 규탄하며 대규모 저항 운동(6.3 항쟁)이 일어났습니다. 이 운동은 군사 독재에 맞선 ‘반독재 민주화 운동’ 의 성격을 띠었고, 비상계엄령 선포와 탄압에도 불구하고 이후 민주화 운동의 사상적 자산이 되었습니다.
진실을 밝히는 한일 시민들의 연대
일본 정부가 ‘승선자 명부가 없다’며 은폐했던 우키시마호 사건 명부 발굴 및 조세이 탄광 수몰 사고 희생자 유골 수습 등, 일본 시민사회의 양심적인 활동을 통해 강제동원 희생자들의 진실이 밝혀지고 있습니다. 또한 한국과 일본의 시민 및 연구자들은 강제동원 진상규명 특별법 제정 운동과 외교문서 공개 활동을 이어오고 있습니다.
역사 부정론에 맞서다
일본 정부는 ‘메이지 산업혁명 유산’(군함도 포함) 등재 시 강제 노역(forced to work)이 있었음을 인정하고 희생자 기림 정보센터를 설치하겠다고 약속했으나, 이후 약속을 뒤집고 강제동원 자체를 부정하는 전시를 강행하여 국제적 비판을 받았습니다. 이는 ‘사도광산’ 등재 추진에서도 반복되었으며, 고통의 역사를 지우려는 시도에 피해자들은 맞서고 있습니다.